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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코로나바이러스 영향으로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어릴 적부터 관심이 많았던 6.25 전쟁에 관한 포스팅을 하려고 합니다. 때마침 6월이 시작되었고 곧 6월 25일이 다가오겠네요. 오늘 포스팅의 자료는 어린시절 즐겨 봤던 KBS 역사스페셜 33회 방영분을 토대로 작성됩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한 건 6월28일 오전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한 건 7월1일이다. 우리가 의문을 갖는 건 바로 이 6월28일부터 7월1일까지 3일간의 북한군의 동정이다. 이들은 왜 3일간 강을 건너지않고 멈춰있었던 것일까? 뭐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당시 한강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기쁨에 들떠 잠시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쉴새없이 진격해 내려온 북한군이 군의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 머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3일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아주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군사령부가 매일매일 군부대에 내려보냈던 군정보가 있다. 그 중에 1951년 5월15일자를 보면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을 뚫지못하자 김일성은 북한군 사령부에 그 원인을 분석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원인을 뽑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서울을 점령한 뒤 한강을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건 김일성 스스로가 전쟁실패의 원인으로 분석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3일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걸까?
1950년 6월28일,강이북은 북한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강이남엔 다리가 폭파된 뒤 중장비는 모두 버리고 나룻배를 이용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한국군이 주둔해있었다.
반면 강이북의 북한군- '6월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6월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당시 북한군은 다섯 개의 사단과 함께 35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한국군에 비해 북한군의 전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겁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북한군이 한강을 곧바로 건넜고 이후 1일 25키로 속도로 진격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군은 3일만에 조치원, 그리고 6일만에 대전을 점령하게된다. 무서운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강이북에서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바로 그 사이 한국군은 재정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28일 오후부터 한국군은 분산철수하는 낙오병들을 수습한다. 그리고 다음날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수습된 세개부대를 한강이남에 배치하게 된다.. 북한군이 강이북에 머물러있는 사이 한강이남의 한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 사이 한국에선 새로운 변수가 발생한다. 6월29일,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한강의 상황을 보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1일 미군 육군 부대가 긴급히 투입된다.
이렇게해서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동안 한국군은 방어력을 갖추게된다. 북한군에 밀려 한강이남으로 쫓겨내려왔던 3일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의 양상도 바뀌게된다. 방어력을 갖춘 한국군은 지연전을 펼치게 되었고 그사이 시간을 번 한국군은 반격작전을 준비하게된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었던 3일의 시간은 이렇게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군은 3일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던 겄일까?
<러시아 국립자료보존소>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쟁직전 만들어졌던 북한의 남침작전서가 있다. 이 작전도에서도 당시 북한이 서울만 제한점령하려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진격방향은 한반도남단까지 그어져 있다. 뿐만아니라 이 작전도는 북한이 어떻게 남한을 점령하려 했는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작전도를 살펴보면 일단 1차목표지점은 수원,원주,삼척이다. 그리고 이후엔 세개 방면으로 나눠서 남한을 완전히 점령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원래계획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점령하려했다. 그러기위해 1단계작전이 중요했고 수원포위의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단계작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1단계) 특히 수원이북지역이 강조되어있다. 이는 서울에서 한국군을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부대가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2단계부분 이렇게 수원이북에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면 이후엔 큰 저항없이 쉽게 진격한다는 계획이다. 선제타격작전이라고하는 건 세계 제 2차대전가운데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략전술개념이었다. 주공병력으로서 전면공격을 하고 조공병력으로 포위공격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면 1개월내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군의 개입을 막기위한 속전속결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시 춘천으로 투입된 부대는 북한군 2사단이다. 이들은 북한군이 전쟁 2개월전에 실시한 검열작업에서 최우수 정예부대로 뽑힌 부대로 6월25일 새벽,38선을 넘어 춘천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2사단은 채 30분도 지나지않아 이곳 모진교를 돌파했다. 당시 2사단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 뒤 곧바로 가평..가촌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도록 되어있었다.그 작전의 첫 목표지점인 모진교돌파는 예상대로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옥산포였다. 당시 이곳 옥산포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춘천을 방어하고있던 한국군 6사단은 뒤늦게 남침소식을 듣고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북한군은 잠시 멈칫했다.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한국군은 이미 예비대까지 출동해 우두산측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세어진 한국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은 옥산포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못한채 하루를 보내게된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시 철저히 준비를 하고 진격해왔던 북한군을 어떻게 한국군6사단은 막아낼 수 있었을까? 당시 한국군 6사단은 옥산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군6사단은 곧바로 이곳 진지로 투입돼 진격해 오고있는 북한군을 향해 정확히 총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6사단7연대는 전쟁이 나기 한달 전 군사병들과 춘천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이곳 우두산에 참호를 팠다. 그리고 참호의 주인을 정해놓고 실전처럼 훈련을 했다. 유비무환의 일면이었다.
이렇게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고있던 한국군은 다음날 소양강일대로 후퇴한다. 물에서 소양교로 팬 양구쪽에서 진격해오고 있는 북한군으로부터 포위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한국군6사단은 이틀간이나 격전이 벌어졌다. 소양교는 춘천으로 들어가기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못한 북한군 2사단은 소양교를 건너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미리 진지를 구축하고있던 한국군의 거센 반격에 꼼작을 하지못한다.
춘천전투 틸다운 무극리전투 6사단은 춘천전투외에도 많은 전과를 올린 부대다. 당시 한국군 6사단의 병력과 화력은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약했다. 병력은 북한군에 4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며 화력도 북한군의 수준에 못미쳤다. 당시 포만 비교해봐도 북한군의 포는 122미리포였고 한국군6사단의 포는 105미리 곡사포였다. 사정거리만으로도 그 성능이 두배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포는 북한군에게 위력적이었다.
포병은 다른 병과와 틀려서 제 요소가 통합되었을 때 올바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들어 사격지휘라든지 관측등 제요소가 서로 통합되었을 때 요망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건 평시 교육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당시 미리 구축해놓은 방어진지에서 철저히 실전훈련을 했었기에 화력이 약한 포로도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6사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은 모두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국 27일저녁엔 6사단도 후퇴하게되었다. 하지만 한국군 6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사흘이란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춘천에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지않자 홍천쪽으로 진격해가던 북한군 12사단중 2개연대를 춘천으로 급히 보낸다. 이는 당시 춘천지역에 있던 북한군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천쪽은 어떠했을까? 당시 홍천에 투입된 북한군 12사단은 중공군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는 아주 막강한 부대였다.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북한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못했다.
홍천점령의 임무를 맡은 북한군12사단은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군방어선을 뚫고 거침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12사단의 발목이 잡힌 곳이 이곳 말고개다. 당시 북한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북한군의 가장 강한 무기인 탱크가 이곳에서 10여대나 부숴졌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있던 부대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였다. 북한군 12사단에 밀려 후퇴하던 한국군 6사단은 이곳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북한군이 보유하고있던 T-34는 85미리 포를 장착하고 있는 최신형의 중전차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경전차를 일거에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T-34전차에 맞설만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6사단 2연대는 좁은 길을 따라서 진격해 T-34전차와 맞서기위해 인근산에 대전차포와 소총을 배치했다. 그리고 11명으로 구성된 육탄돌격대도 결성했다. 당시 육탄돌격대들은 꼬불꼬불한 지형을 이용해 길옆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대전차포의 기습을 받은 탱크들은 느린 속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육탄돌격대들은 전차에 뛰어올랐다.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뛰어내리는 것이 육탄돌격대의 임무다. 대전차포와 육탄돌격대의 기습으로 6월28일 말고개에서는 북한군의 전차진입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육탄돌격대원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한국군6사단 2연대의 방어전으로 인해 북한군 12사단 역시 28일까지 홍천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춘천,홍천지역의 점령을 맡았던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의 계획은 무너졌다.
북한군 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건 6월28일이다. 당일 점령계획에서 3일이나 지연된 것이다. 이후 이들이 남하해 양평쪽의 한강을 넘은 건 7월1일이었으며 용인을 점령한 건 7월5일이었다. 이로인해 북한군의 계획엔 차질이 생긴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건 7월5일이었다. 이때 강이북에 있던 북한군도 내려오지만 이미 한국군은 이남으로 안정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수원이북에서 주력부대를 섬멸하려던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더욱이 이미 이 때 한국군은 전력을 보강했으며 미군과의 협력하에 방어계획을 수립한 뒤였다. 이렇게해서 한달만에 한국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작전은 무너진다.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원인을 한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라며 통탄했다.
국군 제6사단의 춘천전투(1950. 6. 25∼30)
춘천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중동부 전선의 춘천과 홍천 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5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2개 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2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춘천전투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에 비유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커다란 타격을 준 전투였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은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원주에 집결보유하여 적목리로부터 진흑동까지 84㎞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방어지역 서측의 북한강과 전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양강을 이용하여 제7연대는 소양강 북안에, 제2연대는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하지만 좌일선의 제2연대는 6월 20일에 사단에 예속되어 가까스로 이곳에서 제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으며, 예비인 제19연대도 5월 1일에 예속된 바 이들의 방어 및 전투태세는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1/3병력이 외출·외박한 상태이지만 사단은 6월 19일에 생포한 포로진술과 정찰대를 화천과 양구에 파견하여 확인한 정보에 따라 적의 전면적 또는 국지적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체로 경계조치를 취해두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제2군단으로써 북한군의 조공으로 중·동부지역 공격을 담당하여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할 계획하에 그 예하 제2사단을 주공으로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하고, 인제-홍천 축선에는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을 투입하였다. 이들은 조기에 춘천·홍천을 점령하고, 서울 포위를 위해 이천-수원으로의 우회기동을 할 계획이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와 제2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춘천 북방과 인제 남방지역을 동시에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2사단은 아군 제7연대지역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일부병력을 북한강 계곡으로 침투시켜 아군 제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여 춘천북방에서 섬멸하려고 하였다. 제7연대는 제1대대를 북한강 계곡에 투입하여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면서 지지를 고수하였으며, 포병은 화력을 집중하여 전진해 오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은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관대리 남쪽에 위치한 38교를 지키고 있던 1개 소대병력에 의해 2시간이나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제2연대는 예비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자은리(自隱里)에서 전방으로부터 지연전을 펴온 제1대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전차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리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3대대가 후퇴함에 따라 6월 26일 오후부터는 자은리 방어선을 포기하고 한계리와 북창을 잇는 말고개로 철수하게 되자, 제6사단 퇴로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적 제2군단장 김광협은 춘천을 공격하던 제2사단의 공격이 부진하자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를 제외한 주력을 춘천의 동측방 공격에 가담케 하였다. 제2사단의 서울 동남방의 진출이 지연될 경우 북한군의 전반적인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적 제2군단장의 조치였던 것이다.
6월 27일 적은 제12사단 병력으로 증강된 제2사단을 투입하여 춘천 탈취를 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홍천 북방 말고개에도 맹렬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에 제7연대는 병력부족으로 춘천 남쪽 원창고개에 제2대대 병력을 배치한 후 홍천으로 철수하였으나, 원창고개에 있던 제2대대는 거짓 항복해 오는 적군을 환영하다가 기습을 받고 고개를 빼앗겼다. 또 말고개를 지키고 있던 제2연대도 제19연대의 지원을 받아 적을 막아내다가 명에 의하여 6월 29일 밤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개전 이후 3일간이나 춘천을 확보하며 선전했던 국군 제6사단은 비교적 사단의 편제를 유지하면서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였다. 5일간에 걸친 춘천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제2사단의 서울 진출을 봉쇄하였으며, 적 제2, 제12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김일성은 춘천전투의 패전을 물어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崔賢) 소장으로, 12사단장 전우 소장을 최충국(崔忠國) 소장으로 교체하고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金武亭)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적 살상 6,800명, 포로 120여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한 반면, 아군은 전사 200명, 부상 350여명, 그리고 1,300여명의 실종자가 나왔으나, 이들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수도권을 포위하기 위하여 2개 사단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기동시키려던 당초의 작전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춘천지역은 6.25 개전당시초기 3일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6.25전쟁사를 바꾼 중요한 곳입니다.
당시 김종오 사단장은 다른 사단들이 다수병력을 농번기철 휴가를 보내거나 외출외박을 보냈고 무기/장비는 정비대로 수리/정비를 보냈지만 당시 적정상황을 인식한 김종오사단장은 전체병력과 무기/장비를 사용가능한 상태로 하고 전체병력중 전투가용병력을 제외한 일부병력만 휴가를 보내서 사단건제를 유지했죠.
성공적인 춘천방어는 적 공격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서울지역 부대에까지 파급효과를 내서 서울점령에 시간을 지체햇다는 결과를 낳앗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개전초기 전투에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6사단이 유일했다고합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전투입니다. 6사단 청성부대가 3일간 춘천에서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이 반격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일끌수가 있었던 개기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배를 이 춘천전투에 두고 있습니다. 춘천에서의 6사단의 맹렬한 저지로 말미암아 3일간의 진격을 하지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배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6사단 청성부대는 한국전쟁중에서도 단 한번도 패전을 하지 않았으며 전군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적에게 사단기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북한군이 제일로 무섭고 두려운 사단이 저희 사단이었으며 김일성이 사단장 김종오 장군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을 정도로 저희 6사단은 북한군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후퇴작전에서도 6사단은 패배만 당하던 국군에게 유일한 대부대 승리를 안겼는데 동락리·이화령전투에서 적 연대급이상을 전멸시키다시피해 승리함으로써 국군의 사기를 높이는 등 패전을 모르는 상승부대였죠.
그 이후 6사단은 중공군 대부대의 공격을 격퇴한 용문산 전투를 비롯해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한 각처에서 주요한 전투를 잘 치러서 용맹을 떨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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